[아닌척]아재인증
그녀는 이대생이었다.
이른바 '과잠'(학과 점퍼) 등짝엔 'Ewha'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선명하지 못했다.
요즘 빠져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을 읽으며 출근하던 중 이대 후문 정류소에서 '딸그락' 얇고 작은 플라스틱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등짝에 'Ehwa'를 단 그녀가 헐레벌떡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저기요" 라고 불렀으나 그녀는 듣지 못했다. 일어나기는 귀찮은데.
하지만 교통카드이자 점심 식권이면서 저녁 술값이고 집으로 돌아갈 택시비일 수 있는 그 카드가 없어졌을 때 밀려드는 당혹감은 겪어 본 사람만 안다.
엄마나 아빠한테 잔소리를 잔뜩 얻어먹고 분실신고를 하기 전에 누군가 그걸 주워 금은방에 달려가서 금붙이를 잔뜩 결제하고 튀면 어쩌나. 혹은 그 신용카드가 혼자 열심히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모은 돈이 든 통장에 연결돼 있으면 어쩌나.
귀찮음이 이런 오지랖에 무릎을 꿇고 나를 일어나게 만들기까지 그녀는 버스 문 앞에서 교통카드를 찾느라 온 몸을 뒤지고 있었다.
"저기요" 라고 한 번 더 불렀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급기야 그녀는 교통카드를 찾는 걸 포기하고 그냥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급해졌다. 사람을 두번이나 부르면서 남의 카드를 들고 버스 맨 앞까지 나갔는데 버스 문이 닫히고 출발한 뒤 멍청하게 돌아오는 내 모습이 잠시 머릿속을 스쳤다. 급해진 입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나갔다.
"학생!"
...
"학생"이라니. 그 말은 고등학생 무렵부터 군에 가기 전까지 꽤 나이가 많은 분들이 나를 부르던 말이 아니던가. 식당 이모님이나 길을 묻는 부모님 나이대 분들이 나를 "학생"이라고 불렀었다. 학생은 절대로 학생에게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절대로 학생이 아닌, 학생이 아닌 지 상당히 오래 된 사람들이 학생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학생이라니. 나는 어느새 학생으로 불리지 않고 학생이라고 부르는 아저씨가 된 것인가.
"하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진심이 듬뿍 담긴 인사를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가며 "학생"이라는 말을 하는 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걸 알고는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나는 착한 일을 했어. 남을 도왔다구.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녀는 감기에 걸렸는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모자를 푹 눌러 쓴 게 아침에 머리를 감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졸던 중 헐레벌떡 내리다가 카드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버스 밖에서 카드를 건네 받으며 또 무언가를 땅에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좋은 일을 했을 뿐이다. "학생" 같은 호칭 따위는 잊어버리자.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는데, 아 참. 카드를 찍고 돌려줄 걸 그랬다는 생각에 조금 후회가 됐다. 그랬다면 좀 더 센스 있는 아재가 됐을 텐데.
끝.
Leave [아닌척]아재인증 to:
Read more #kr posts
Best Posts From shiho
We have not curated any of shiho's posts yet. But you can encourage our curation team to review posts by visiting them regularly and by referring other readers. Because we give priority to frequently read content.